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빈 체제 (문단 편집) == 동요와 붕괴 == 빈 체제의 성립에도 불구하고 이미 유럽 각 지역에서는 [[나폴레옹 전쟁]]으로 프랑스 혁명의 이념들이 퍼져 있었다. 곧 유럽 각지에서 빈 체제에 대한 반발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. 진보주의자, 자유주의자들은 빈 체제가 역사의 수레바퀴를 거꾸로 돌리려고 하는 말도 안 되는 시도라고 반발했고 [[독일]]과 [[이탈리아]] 지역에서는 [[통일|내셔널리즘 열풍]]이 불었으며 프랑스에서는 [[7월 혁명]]이 일어나 [[루이 18세]]의 뒤를 이은 [[샤를 10세]]가 폐위되었다. 또한 이 체제에서 중요 역할을 맡았어야 할 [[영국]]은 [[산업 혁명]]과 해외 [[식민지]] 진출에 골몰하느라 관심이 없었으며[* 게다가 영국은 이미 100여년 전 오랜 세월에 걸친 [[왕권]]과의 투쟁의 결과 다른 유럽 국가들에 비해 자유로운 사회 환경이 갖춰져 있었으므로 타국에 비해 '''[[탄압]]'''의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덜했고, 심지어 구체제를 혐오하는 성향도 다분했다.] [[러시아]]도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았다. 또한 [[그리스 독립전쟁]]에서 [[영국]]과 [[러시아]]는 오스만을 견제하기 위해, 자유주의와 내셔널리즘의 확산을 막아야 한다는 빈 체제의 이념을 무시하고 [[그리스]]의 독립을 지원했다. 게다가 그리스 독립전쟁으로 유럽에는 [[1848년 혁명|다시 열병에 가까운 자유주의, 내셔널리즘 운동이 불기 시작했다.]] 샤를 10세의 뒤를 이은 것은 친(親) 혁명 성향의 [[루이필리프]]였으나 1848년에 프랑스 [[2월 혁명]]이 벌어져 프랑스에 공화정이 세워졌고 오스트리아에서도 3월 혁명이 벌어져 메테르니히가 축출되면서 빈 체제는 막을 내렸다. 외교적으로 본다면 [[오스트리아 제국|오스트리아]]-[[프로이센]]-[[러시아 제국|러시아]]의 [[신성 동맹]]이 붕괴된 [[크림전쟁]](1854년)이 결정타였다.[* 그러나 오스트리아가 정치 체제상 자유주의, 내셔널리즘 운동 확산 방지를 목표로 한 빈 체제로 인해 받는 수혜가 가장 큰 나라였기에 발칸 반도에서 이익을 지키겠다고 스스로 빈 체제를 무너트린 것은 장기적으로 보면 어리석은 짓이었다. 그리고 기존의 유럽의 평화 질서가 완전히 붕괴된 [[제1차 세계 대전]]으로 오스트리아 제국은 붕괴하게 된다.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